만약 일제강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던 독립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만약 홍범도 장군같은 독립 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독립 운동을 했을까? 그러나 독립은 되었는데, 아직도 이분들을 독립운동가로서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과거 이력 문제로 독립 운동 사실 조차 논쟁거리가 된 홍범도 장군을 생각하면 편지를 쓴다.
머슴의 아들
그러나 1868년 출생과 함께 산후통으로 모친과 이별하셨죠.
머슴의 아들, 머슴은 조선 시대 상민이 먹고살기 어려워 궁지에 몰릴 때,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생존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세도 가문과 탐관오리 무리배, 지주들의 수탈은 농민들을 낭떠러지로 내몰았으니까요.
정약용의 ‘애절양’에 등장하는 남정네가 왜, 자신의 양기까지 잘랐을까요?
나팔수와 출가
9살 어린 나이에 부친마저 돌아가셨죠.
오로지 혼자가 되어 군영의 나팔수로 의젓한 군인이 되셨죠.
그러나, 군영의 삶도 장군님의 평범한 삶을 내버려 두지 않았지요. 고통스러운 선택이겠지만 머리를 깎고 출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피신보다는 주린 배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으니까요. '명'을 건국한 주원장도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아내, 아들도 잃고 조국도 잃은 의병장
절에서 아내를 만나 파계를 선택하고, 다시 속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던데, 그 또한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하던 일제의 총포화약류 회수 조치는 '포수 홍범도'를 '의병장 홍범도'로 만들었죠. 삼수, 갑산 장군님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하루에 수차례 전투에서 호랑이처럼 용맹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병 전투 중에 아내와 큰아들도 잃었습니다. 결국은 지키려 했던 조국마저 잃었죠.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국내 의병 항쟁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간도, 연해주로 이주하고, 의병은 자연스럽게 항일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죠.
장군님도 대한독립군의 대장으로 끊임없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습니다. 일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삼둔자 전투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대대 규모의 일본군을 편성하여 간도로 출병했겠어요?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봉오동 계곡으로 유인하여 일본군을 괴멸시켰죠. 몇 년 전 봉오동을 찾았지만 중국 당국이 댐으로 만들어 출입이 불가능했는데, 댐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계곡이 깊다는 것이죠. 이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것도 대단하십니다.
결국, 일제는 소규모 부대로 독립군을 당해낼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며 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일본군 대규모 사단을 만주로 출병시켰습니다. 일제의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만주, 연해주 독립군의 존재는 향후 한반도 지배와 대륙 진출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본군의 만주 출병은 만주 군벌 정부와 독립군 사이의 갈등을 초래했고, 독립군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백두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이 가까워지면서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죠. 6일 밤낮으로 싸운 전투에서 장군님은 궁지에 몰린 독립군을 구출해 냈고, 일본군을 또다시 1000명 이상 사살하는 대승, 아니 대첩을 이뤘습니다.
독립군의 시련
청산리 대첩의 승리 소식은 의도치 않게 우리 동포들의 터전인 간도 일대의 동포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습니다. 간도 참변으로 더 이상 간도를 근거지로 독립군이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독립군이 간도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독립군은 물론 우리 동포들에게도 위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밀산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통합 재편성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로 지명될 수 있었습니다. 장군님의 전과를 모두가 인정했기 때문이죠. 머슴의 아들, 군영의 나팔수, 미천한 승려, 포수, 그리고 의병에서 독립군 부총재가 되었죠.
그런데 1920년 겨울, 일제의 압박 못지않게 식량 등, 독립군에게 닥친 문제로 무장 투쟁을 지속하기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이때도 장군님은 부하들의 추위와 굶주림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마침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적군의 지원 약속도 있고, 장차 독립군의 미래가 달려 있는 자유시로 이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도 보다도 더욱 낮 선 시베리아 동토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죠.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기 위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장군님은 어느 편에 합류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오히려 쉬운 결정이었습니다. 항상 과정에서 장군님은 오직, 부하들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 당시 우리 독립군이 비참하게 희생된 사정을 듣고 통곡했다고 하니, 장군님의 아픈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부하를 먼저 생각했던 지도자
1922년 사회주의 정권인 소련 체제가 수립되고, 홍범도 장군은 부하들의 먹고사는 것에 항상 발 벗고 나섰습니다. 레닌에게 그동안 전공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부하와 동포들의 생계를 제안하기까지 하셨죠. 또한 1927년 공산당 가입도 집단 농장 운영과 부하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쓸쓸한 죽음
1937년 일제가 소련을 침략하면, 소련 내 우리 동포들이 일본을 편들까 의심되어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연해주 동포들을 불모지인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죠. 장군님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드로 강제 이주 당하셨습니다. 그래도 동포들은 강한 생존력으로 불모지에서 정착할 수 있었으며, 장군님은 고려극장의 수위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금을 합해도 당시 소련 노동자들의 수입의 절반도 되지 않으니 얼마나 고단하셨지 짐작이 됩니다.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호랑이, 부하와 동포들에게는 자상한 지도자인 홍범도 장군님은 독립을 2년 앞두고 1943년 75세의 나이로 쓸쓸히 이국땅에서 돌아가셨죠.
부관참시? 독립된 조국인가?
지배층으로부터 수탈받던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을 수탈한 조국을 위해 의병을 조직하고, 그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사셨던 홍범도 장군, 당신께서 2021년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신이 돌아오셨을 때, 가슴이 벅찼습니다.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시다 돌아가시고 독립을 맞이하였지만,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아직도 먼 이국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독립지사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도 다행히 장군님을 고국으로 모실 수 있어 기뻤습니다. 다만, 통일된 조국의 고향으로 모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적잖은 용기가 없으면 선택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그런 독립운동가들이 과연 조국의 분단을 염두에 두었을까요? 또한, 독립이 되었어도 일부 독립지사들은 분단된 나라의 어느 곳에도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통탄한 일입니까? 신흥무관학교 출신,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조직과 광복군 부사령관이었던 김원봉 선생이 남쪽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서 잡혀가 따귀를 맞아가며 고문을 당하고, 북쪽에서는 김일성 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지요.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전쟁에서 패한 독일 등의 식민지가 장차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었지 우리 민족같이 승전국의 식민지와는 무관한 선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민족자결 원칙’에서 식민지 약소민족 전체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수단은 중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앞당기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선택했죠. 오죽했으면, 신채호, 이회영 선생님은 아나키스트를 선택했겠어요?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사회주의 이념은 안타깝게도 해방 후 분단 세력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이 되었지요.
분단 상황인 현재의 비뚤어진 시각으로 과거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에 대한 폄하는 옳지 못합니다. 과연 홍범도 장군이 바라는 독립된 나라의 모습이 이런 나라일까 궁금합니다.
2023년 9월의 오늘,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모셔진 다섯 분의 독립군 장군님들의 흉상을 철거한다고 날립니다. 장군님의 1927년 공산당 가입 경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웃긴 질문이지만, 묻고 싶습니다. "장군님은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정권 수립을 목표로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활동하셨나요?" 오히려,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개교와 국군 창설 과정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이 주축이 되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통탄할 일입니다. 혈서로 일왕에 충성 맹세하고 간도 특설대원으로 독립군을 살육, 해방 이후 자신을 위해 좌익 선택과 배신, 쿠데타로 4.19 정신 파괴, 그리고 유신독재의 지도자였던 분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추앙받고 있습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장군님이 목숨을 바쳐 바라던 독립국의 모습이 이런 조국인가요?"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몇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역사와 민족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화이부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크라이나에 지원 약속한 3조원은? (36) | 2023.09.14 |
---|---|
선동과 정치 (86) | 2023.09.13 |
교권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45) | 2023.09.04 |
[이슈 분석]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55) | 2023.08.26 |
은장도 Vs 너클 (91) | 2023.08.22 |